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클라우디우스 1세 (문단 편집) == 여담 == * 아우구스투스가 자신의 혈육 중 애지중지했고, 탄생을 지켜보고 이름을 지을 때에도 함께 한 남자황족이다. 이때 아우구스투스는 대 드루수스, 소 안토니아 부부의 다섯 번째 아이가 출생 임박이라는 소식에 이례적으로 갈리아의 루그두눔으로 행차해, 이곳으로 티베리우스를 손수 부른 다음 클라우디우스가 태어나자 자신의 손자가 태어났다면서 크게 기뻐했다. 그래서 클라우디우스가 루그두눔에서 태어난 뒤, 이름을 지어준 뒤 큰 행사가 열릴 때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가 모두 참석하는 진귀한 장면이 갈리아의 루그두눔에서 연출됐다. * 후대의 수에토니우스로 대표되는 반대파들에게 술과 버섯요리를 탐닉하고 여성편력이 있으면서도 아내에게 잡혀산다고 비아냥을 들었다. 또 검투 경기 중 패배한 검투사의 죽어가는 표정이 궁금하다며 죽게한 행동으로 알고 보면 잔인한 면이 있다는 비판도 받았다. 그러나 이런 평가에도 클라우디우스는 아버지 대 드루수스, 형 게르마니쿠스와 마찬가지로 성품 자체가 따뜻하고 상당히 도덕적이었으며, 머리회전이 빠른데다 무척 성실했다. 성격 역시 비밀스럽지 않았고 예의를 항상 갖추어 지위에 상관없이 상당히 깍듯했는데, 클라우디우스는 죽을 때까지 원로원을 무시하거나 기사계급들에게 강압적으로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원로원은 이런 클라우디우스의 신체적 장애를 이유로 무시했고,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처럼 립서비스로 협조만 요청한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따라서 거의 대부분의 원로원 의원들은 늘 클라우디우스의 협조 요청을 들으면 그 진위를 항상 의심했다.] 또 그는 나이가 들어감에도 권위적이지 않고, 동년배의 오랜 친구 [[갈바]]와 달리 고지식하기보다는 유연한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클라우디우스가 제위에 오르기 전부터 친구였던 갈바는 젊은 시절부터 지나칠 정도로 보수적이고 사고가 고지식했다. 또 그는 나이가 지긋한 앞세대의 로마 귀족들도 하지 않은 관례까지 전통적이라면서 모두 지킨 귀족이었는데, 네로가 몰락한 이후 제위에 올랐을 당시에는 젊은 시절의 총명함까지 사라지고 사생활 역시 엄격함 대신 은밀하고 이중적으로 변했다.] 이는 큰아버지 티베리우스조차 인정할 정도의 장점이었으며, 말년의 티베리우스가 클라우디우스를 어린 가이우스(칼리굴라), 티베리우스 게멜루스의 징검다리 격의 차기황제감으로 진지하게 고려한 이유였다고 타키투스 등은 기술하고 있다. * 역대 로마 황제 중 풍자작가들에게 조롱을 많이 받았고 [[수에토니우스]]는 클라우디우스의 즉위와 삶 자체를 평생토록 회복 불가능한 신체적, 정신적 장애로 고통받는 기괴한 사람으로 묘사하며 조롱했다. 수에토니우스는 이 사람의 즉위를 익살스러운 코미디로 희화화하며 묘사해, 오늘날 사람들에게 얼간이로 알려지는데 크게 기여했다. 더욱이 클라우디우스는 사후 [[세네카]]와 [[네로]]에게 수년간 매일 같이 [[고인능욕]]을 당했다. 세네카의 경우, 어느 정도로 심각한 조롱인지 풍자작가들조차 양심상 하지 않은 "꼽추", "목소리조차 어느 육상동물보다 못한 노인네" 등의 질 나쁜 조롱까지 클라우디우스에게 하고, 이를 네로 등과 함께 이야기하며 클라우디우스를 능욕했다. 이는 양자이자 사위, 외종손 네로의 조롱도 마찬가지였는데, 네로는 죽을 때까지 습관적으로 클라우디우스의 말더듬 장애와 걸음걸이를 조롱하고 공개석상에서 희화화했다. * 불편한 몸과 달리, 형 게르마니쿠스와 누나 리빌라처럼 외모가 잘생기고 아름다웠다고 한다. 클라우디우스는 키가 상당히 크고 목소리가 좋았으며 신체 균형이 뛰어난 체형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목이 길면서 굵은 단점 외에는 상당한 미남이었는데, 즉위 당시부터 반백발이고 회색 눈동자를 가진 기품 있는 잘생긴 외모와 훌륭한 체형으로 인해 로마 귀족으로서의 위엄과 품격까지 느껴졌다고 한다. * 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의 전폭적인 후원 아래, 어린 시절부터 리비우스를 비롯한 당대 최고의 로마, 그리스 석학들 밑에서 역사, 천문학, 지리학, 의학 등을 배운 탓에 일찌감치 역사가이자 교양 높은 학자로도 명성이 자자했다. 하지만 이런 명성은 황족인 신분보다는 본인 스스로도 계속되는 역사 연구와 골동품 수집 등을 통해 [[에트루리아]], [[카르타고]] 역사에서 두각을 나타낸 이유가 더 컸다. 그래서 그는 당대 최고의 로마사, 에트루리아사, 카르타고사 권위자로 유명했다. 실제로 로마 황실의 일원이자 최고명문귀족이었던 클라우디우스는 [[라틴어]], [[그리스어]]뿐만 아니라[* 당시 로마 교양인들과 상류층들은 모국어인 라틴어와 지중해 동부 일대의 공용어인 그리스어 모두에 능통했다.] 당시 로마 지식인들도 쉽게 구사하기 힘들었던 [[에트루리아어]], [[페니키아어]]까지 상당한 완성도로 구사할 줄 알았다. 황실의 일원인데도 정치에 집중할 수 없는 한계로 정치 대신 학예에 집중해서 높은 성과를 거둔 것으로는 먼 후대 동로마의 [[콘스탄티노스 7세]]와도 공통점이 있다. * 즉위 당시부터 자신의 롤모델로 외할머니의 남동생이자 양할아버지인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했다. 그런데 이는 립서비스가 아닌 진심이었고, 클라우디우스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에게 따뜻했던 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를 대단히 존경했다. 살아생전 아우구스투스는 진심으로 어린 손자 클라우디우스가 사회적 위축감으로 음주와 도박의 길로 빠지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고, 가정교사를 선정하는 과정과 교사들의 클라우디우스에 대한 자세까지 세심히 신경쓰기로 유명했다. 따라서 클라우디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바람대로 일찌감치 대역사가 리비우스의 개인 지도 아래에서, 로마 법과 정치 문화를 배웠다고 하며 아우구스투스가 붙여준 교사들이 제국 안에서 알아주는 그리스 과학자들과 학자들인 터라 그 인맥의 깊이 역시 다른 귀족들의 판단과 달리 대단했다고 한다. 여기에 더해 아우구스투스는 클라우디우스에게 항상 자신감을 심어주려고 노력하고, 그의 강점이 발휘되도록 대단히 신경썼다. 따라서 클라우디우스는 즉위 전 본인이 직접 아우구스투스의 일대기를 기록한 위인전을 만들어 출판했고 즉위 후에도 입버릇처럼 아우구스투스를 닮으려고 노력했다. * 로마 귀족 중 입양 없이 즉위 전까지 이름을 여러 번 개명한 사람이다. 태어날 당시 이름은 '데키무스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였지만, 얼마 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로 바꿨고, 기원전 9년 아버지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가 요절하고 그와 유가족이 원로원에게 받은 존칭 '게르마니쿠스'를 일가가 받으면서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로 재차 개명했다. 이후, 서기 6년 6월 백부 [[티베리우스]], 친형 [[게르마니쿠스]], 사촌형이자 매형 [[소 드루수스]]와 육촌 사이인 [[아그리파 포스투무스]]가 아우구스투스의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에 모두 입양될 때, 다시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게르마니쿠스'로 이름을 바꿨다. * 보통은 칼리굴라와 네로 사이에 낀 듣보잡 황제로 여겨지지만 한국에서는 [[시오노 나나미]] 덕택에 재평가되었다. 네로가 황제에 오른 이후 [[세네카]] 등이 〈Apocolocyntosis divi Claudii〉(神皇 클라우디우스의 [[박(식물)|박]]化. 대략 '조롱박이 된 신황 클라우디우스'로 번역할 만...)라는 제목의, 저승에 간 클라우디우스가 신이 된 아우구스투스에게 까이는 희곡을 썼는데[* 천국 문 앞에 와서 자신을 신으로 인정해 달라는 클라우디우스의 요청에 유피테르가 여러 신들을 모아서 그의 신격화를 인정해 줄지에 대해 회의를 열었는데, 이 자리에서 아우구스투스가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면서 "저런 놈까지 신격화를 인정해 주면 앞으로 누구도 신들을 믿고 공경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주장해 결국 클라우디우스는 신격화되지 못한 채 지하세계로 내려간다는 이야기.] 시오노는 로마의 신들이었다면 클라우디우스를 동정해 주었을 것이고 아우구스투스도 클라우디우스의 통치를 그런 식으로 혹독히 까며 단죄하지는 않고 나름대로 인정해 줬을 것이라고 평했다. * 서구권에서는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로 꽤 인지도가 있던 황제이다. 로버트 그레이브스의 소설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에서는 말더듬이에 약골이라 집안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며(심지어는 어머니에게마저[* 스파르타처럼 약골로 태어난 아이들을 절벽에서 떨어뜨려 죽이진 않았지만, 자식으로 인지하지 않고서 그냥 노예로 만들어버리는 일은 종종 있었다고 한다.]), 유일한 친구였던 형 게르마니쿠스 등은 할머니 리비아의 음모에 희생당하거나 죽어버리지만, 주변 사람의 도움으로 버텨나가며 약골에 바보천치로 알려진 겉모습 덕분에 최후까지 살아남는 인물로 나오며, 리비두스나 폴리오 등으로부터는 성실하고 현명한 청년으로 불린다.[* 다만 리비두스에겐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갈굼당한다.] * 헐리웃 영화에서는 잉여나 돼지로 나오는 경향이 있었다. 종교 영화 성의의 후속작인 데메트리우스와 검투사들에서는 칼리굴라 황제 옆에서 찌질거리는 팔푼이로 나오다가 마지막에 황제가 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악명 높은 포르노 영화 [[칼리굴라]]에서도 비슷한 이미지로 나오고 있다. * [[Fate/Grand Order]]에서는 로물루스 스토리에서 불완전 소환된 역대 황제 중 한 명으로 등장한다. 인게임에서는 그냥 고스트지만. * 4번 결혼을 했고 아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였으나, 그 아내들은 그를 무시하거나 권력쟁취의 도구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현대의 [[퐁퐁남]]과 매우 유사한 결혼생활을 하였다. 특히 세 번째 아내 [[발레리아 메살리나]]와 네 번째 아내 [[소 아그리피나]]([[네로]]의 생모)가 이런 점에서 악명 높았다. 그나마 메살리나 사이에서 '''친아들''' [[브리타니쿠스]]를 보긴 했으나, 그가 죽고 후계 황제 자리는 '''의붓아들''' [[네로]]한테 가로채였다. 게다가 브리타니쿠스는 소 아그리피나에 의해 "제거"되어 버렸으니 극단의 퐁퐁남인 셈이다. * [[플라비우스 왕조]]에서 제위계승법을 만든 뒤, [[티투스]] 황제 아래에서 이 법안에서 명문으로 언급된 세 황제(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의 동전 발행 때, "디부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으로 재차 강조됐다. 그렇지만 클라우디우스는 티투스 황제와 그의 선황 베스파시아누스의 의도 때문에 이름만 빌려주고, 초상 도안은 원로원의 반대 때문에 성문화된 법안에 대놓고 적히지 못한 [[칼리굴라]]가 동전에 초상이 새겨진 까닭에, 본인 입장에선 굴욕(?) 아닌 굴욕을 경험했다. 이는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가 즉위 후 연설에서 칼리굴라를 이들 세 황제와 이들의 마지막 직계혈육 브리타니쿠스 카이사르와 함께 그들의 정통성으로 언급하면서, 칼리굴라와 클라우디우스를 섞어 발행한 꼼수였다고 평가받고 있다.[* 원로원이 플라비우스 황제계승법을 만들어줄 당시, 끝까지 칼리굴라 이름을 넣지 않은 이유는, [[칼리굴라 암살 사건]]에서 밝혀졌듯이, 암살 주동자 20명과 공모하면서 이들의 배후이자 조력자가 된 이들이 원로원 그 자신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베스파시아누스는 원로원에 끝까지 남아, 갓 임기를 마친 법무관이자 칼리굴라 최측근으로서 원로원을 상대로 목숨을 걸고, 암살자 처벌과 원로원 의원들의 즉각 처벌을 외쳤고, 결국 게르만 호위대와 성난 군중 일부를 통제하면서, 원로원 의원들 일부를 때려죽이는 것을 방치했던 과거가 있었다. 따라서 베스파시아누스는 이때의 일로 클라우디우스 황제와 소 안토니아의 해방노예들에게 제대로 눈도장을 찍게 되면서, 귀족 반열까지 오르게 됐다.]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클라우디우스, version=217)]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